한겨레 '덕후왕 선발대회' 당첨되다

일본 오타쿠 사천왕 중에 하나라는 안노 히데야키(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감독)는 오타쿠의 특징으로 ‘내성적이고 커뮤니케이션 부족, 자신의 정보량과 지식량이 주체성을 떠받치고 집착이 엄청나며 자아도취와 독선이 심하고 공격받으면 약해진다’ 라고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는데, 동감하는 한편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그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흔한 일본 TV 애니메이션 하나 보지 않고, 일본어로 된 잡지, 서적 조차 단 한권도 구매하지 않는 나이지만, 자부심을 가질 만큼 오덕질에 매진하던 때가 있었다. 당시 중, 고등학생이였던 내가 모은 모 애니메이션의 콜렉션은 국내에 유일무이 할 정도였고, 급기야는 그 애니메이션에 대한 비공식 학술 세미나 주최에 간접적으로 관여, 발제하여 문집을 만들기까지 하였다. 그랬다. 그 애니메이션에 미쳤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같이 발제를 했던 어떤 분은 그 애니메이션을 통해 페미니즘 및 영상 매체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 눈을 떠 다니던 대학(공과 대학)을 때려치고 미디어 계열 학과로 편입, 대학원에 진학하기도 하였더랬다.

그러나 나는 일본 문화에 너무 물든 내 자신에게 염증을 느껴, 지인에게 내 콜렉션을 다 팔아 넘기고, 한국을 떠났다. 그 애니메이션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진로마저 애니메이션 제작자로 정했지만, 다 포기한 것이었다. 그후로 2년, 돌아온 나는 애니메이션이 아닌 만화로 나의 진로를 수정하였지만 일반적으로 '오타쿠적이다' 라고 말하는 행보는 더이상 걷지 않았다. 뼛속 깊이 오덕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의 폐해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일반 사회에 섞여들어가고 싶었다. 안노의 말처럼, 더이상 '정보와 지식량이 주체성을 떠받치는' 나약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 사회, 음악 등 다른 분야에 눈을 돌렸다.
그러나 문득, 결국 '오덕의 습성'으로 그 분야를 파고드는 나를 발견하고 웃어 버렸다.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분야가 생기면 관련 서적을 다 뒤지고, 관련 평을 모조리 취합하고, 사진 한 장의 수집을 위해 여러 권의 잡지를 사고, DVD를 모으고, 글을 쓰고...

결국 나는 분야만 달라졌을 뿐 오덕질을 계속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 그렇구나, 나는 타고난 오덕이었구나.
일본 애니메이션을 파는 것만 오덕이 아니었다.
오덕은 뭘 해도 오덕인 것이다.

제과 제빵에 흥미를 느낀 동생이 우스갯소리로 '언니가 제과 제빵에 빠지면 좋을 텐데' 라고 이야기 했던 것 처럼 (그러면 관련 책, 도구 등을 자진해서 모조리 사들일 테니) 타고난 오덕 근성, 마니아 근성을 가진 나는 어차피 뭘해도 그렇게 죽도록 파고들었을 것이다. 그것이 다행일까, 불행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식도락에 너무 빠져 전재산을 거덜낸 이가 그걸로 요리만화 스토리를 써서 먹고 사는 것 처럼('맛의 달인'의 키리야 테츠) 오덕 근성이라는 것도,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난 그래도 더이상 일본 애니메이션을 예전만큼 열심히 보지 않을 것이다.

오덕 사천왕이 만든 애니('에바')의 궁극적인 메세지가 결국 '오덕들아. 애니 그만 보고 사회로 좀 나가라!' 였듯 나는 내가 가진 오덕근성을 소중히 여기지만, 더이상 거기에 매몰되어 갇혀 있고 싶지 않다. 오덕 특유의 열렬한 끈기를 활용하여, 사회 발전에 이바지 하고 싶다면, 좀 거창할까? 하지만 그것이, 궁극의 오덕을 지향하는 나의 진짜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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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힐 줄 몰랐는데 5등이나마 당첨이 되었습니다.
근데 하필이면 제가 제일 안 끌리는 상품으로 당첨이 되었더군요 OTL
공지영씨의 '아주 작은 깃털 하나'나 김어준 씨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같은 책들이 받고 싶었는데....
같은 5등상 중에서도 요리조리 피해서 가장 취향에 안 맞는 책으로 당첨이 되다니. 좀 슬픕니다.
뭐 그래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런 응모에 당첨이 되서 기쁘기도 합니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모 애니메이션'이란 소녀혁명 우테나 이고, 우테나 세미나에 개최에 '간접적'으로 관여를 했다는 말은 발제자를 한 분 끌어 왔다는 거지, 뭐 대단한 일을 했다는 건 아닙니다. (허허) 문집 발매도 세미나 개최자이신 살아가자님이시라던가, 권순구님, 달거북이님이 다 하셨고 저는 그저 제 몫의 원고만 썼을 뿐입니다.

그리고 콜렉션.. 이란 것도 글로 보면 거창해 보이는데-_-; 정확히는 소녀혁명 우테나 TV판과 극장판 잡지 일러스트 모음이었습니다. 그외에도 화보집과 트레이닝 카드 복제 사진 등으로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우테나 이미지는 거의 다 모았습니다. 우테나 상영회 때 확인해 보니 달랑 한 장 있는 일러스트를 위해 잡지를 매달(그것도 두세 종류를)사는 미친 짓을 하는 사람은 저밖에 없다는 걸 알고 의외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더랬죠.(하하) 그리고 OST 8개 중 7개, 정품 극장판 비디오 정도? TV판 LD나 DVD도 모으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가난한 10대 청소년에게 거기까지는 좀 무리였죠. 

후에 우테나 상영회와 세미나를 참가하면서 우테나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건 저뿐만이 아니라 저보다 더한 분들도 많다는 걸 느꼈었고 제 발제문 역시 다른 분들에 비하면 비교적 평이한 주제, 평이한 내용이였기 때문에(Art of UTENA 미술사적 측면에서 살펴본 우테나) 살짝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그저, 그 자리에 낄 수 있었던 것이 영광이었죠.

어쨌든 이번 한겨레 기획 덕분에, 오덕 인생(...) 정리해보는 글도 한번 써봤네요.
동생은 한겨레가 저런 사회학적 분석글(핫!)은 원치 않을 거라고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다시 써보라고 권했습니다만, 시간도 없었고 팔도 아파서(이넘의 건초염...) 그냥 이 글로 보냈었죠. 한편으론 고집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덕은 이런 단점도 있지요.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거기에 5등상에나마 뽑아줬다는 건 한겨레가 제 메세지를 이해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멋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by BAT_ | 2009/05/07 12:31 | 뱉의 생각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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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링고 at 2009/05/07 12:51
누군가 말했어. 오덕은 되는것이 아니라 정신을 차렸을땐 이미 그렇게 되어있는것이라고...ㅎㅎ
난 좋다고 봐. 어느 한가지에 몰두할수 있다는건 좋은거라구...(나도 오덕이라 그런건아니고!)
그것이 없는 삶은 너무 건조하달지 재미없달지 밋밋하다고 생각혀...먼가
인생을 완전연소!! 소비하지않고 소멸 하는 느낌이라서..
Commented by BAT_ at 2009/05/07 17:37
뭐, 나도 오덕이 나쁘다(?)라고 하는 건 아니고, 너무 현실 도피식으로 빠져있는 것에 대한 위험성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이지. 중용이 중요한 듯.

오덕이 오덕임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길-! ㅎㅎ
Commented by 원래그런놈 at 2009/05/07 13:16
축하드립니다. :-) 저는 덕후가 되기에는 돈도 없고, 열정도 다른데 쏳는지라.....
Commented by BAT_ at 2009/05/07 17:39
감사합니다^^
어떤 분야든 열정을 쏟는 건 좋은 거죠. (범죄만 아니면-_-;)
Commented by 에바 at 2009/05/07 14:39
우왕- 축하해! 재미난 에피소드가 이번 공모의 주제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겨레가 역시 너의 진지함을 외면할 수 없었나 보다. ㅎㅎ
근데 난 떨어졌어. 글을 너무 성의없이 썼는지도...ㅡㅡ;
예상보다 메일로 응모한 글이 많았었나 봐.
Commented by BAT_ at 2009/05/07 17:43
그러게 나도 한겨레가 나의 진지함에 응해 줄은 몰랐지 뭐야.
근데 언니는 떨어지다니;
넘 시간이 촉박했던 거 아냐? 좀 일찍 알려 줄껄 그랬나.
언니같은 케이스(미소녀 애니 오덕->주부 밀덕으로 변신)는 드물고 재밌어서 꼭 될 줄 알았는데. 아깝다. 다음에 비슷한 기회가 있음 또 도전해봐!
Commented by 갑양 at 2009/05/11 12:40
우아 정말 대단하다;; 역시 넌 글을 잘써~ 그나저나 내 생각에 오덕스러움의 문제는 상대방이 지식수준이 똑같지 않을때에 있는것 같애 ㅋㅋㅋㅋㅋㅋ(..) 머 그것도 사람마다 틀리겠지만~
넌 똑똑하니까 -_-.............췌(..응?)
Commented by BAT_ at 2009/05/13 13:21
ㅎㅎㅎ 고마워!
흠.. 그 말도 맞지. 근데 오덕들은 그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기 보단 커뮤니케이션 자체를 회피하는 경우가 많아 더 문제가 커지는 듯.

근데 밑의 '췌'는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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